- 제목
- 지난 시절에 대한 단상 (90 신진호) (2009.01.10)
- 작성일
- 2023.03.06
- 작성자
- 영문과수업관리조교
- 게시글 내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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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난 시절에 대한 단상
90 신진호
1983년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을 온 나는 이듬해 중학교에 진학하였다. 중학교 1학년 여름 어느 날 동교동 친척집을 방문하다가 얼핏 본 연세대학교는 나에게 너무도 커 보였다. 대학교라는 것에 대해 구체적인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학교를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 연세대학교 앞을 지나가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이었다.
시간이 흘러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연세대학교는 좀더 구체적으로 나에게 다가왔다. 내 인생을 위해 내가 처음으로 커다란 선택해야 할 시점―당시의 고등학생들에 어느 대학교를 가느냐는 문제는 제일 중요한 화두였을 것이다―에서 나는 큰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. 그냥 연세대학교가 좋았다. 중학교 시절 그렇게 커 보이기만 했던 그 학교. 별다른 이유 없이 연세대학교를 가고 싶어 했다.
그런데 왜 하필이면 영어영문과를 선택했던 것일까?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는 학교 선택이 아니라 전공 선택에 대한 정보에 목말랐다. 그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러했겠지만 나 또한 대학교에서 무엇을 공부해야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. 정보를 얻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내 게으름이 원인이었을 게다. 단지 영어영문과를 가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란 생각했다. 당시의 내 성적과는 상관없이 말이다.
그러나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너무도 단순했다. 1990년 3월 입학하여 1998년 2월 졸업할 때까지 나는 영어영문과 학생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매일 스스로에게 질문했다. 난 영어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학생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문학에 소질이 있는 학생은 더더욱 아니었다. 그냥 그들 중의 한 명이었다. one of them… 나는 평범하고 특징 없는 그들과 함께 백양로와 신촌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녔던 것 같다.
문학을 사랑하고 영어를 아끼는 교수님, 선후배, 그리고 동기들을 보면서 그들을 부러워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들이 될 수는 없었다. 영시를 보면서 눈물이 나오지도 않았고 영소설을 읽으며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도 전혀 들지 않았다. 문학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항상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. 왜 이렇게 해석이 안돼!!! 이 시가 도대체 왜 감동적이지? 나만 그랬을까? 강의시간 내내 옆에서 같이 졸고 있던 바로 그들도 나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지 않았을까? 그렇다고 영어학 분야에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영어나 영문에 재능이 없었다는 게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.
그렇다고 해서 재미있게 들었던 강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. 지금까지도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 있다. 바로 Lord of the Flies이다. 복학을 하고 나서 들었던 김태성 교수님 강의 때 읽은 소설이다. 군대에 갔다 와서 정신을 못 차리던(?) 3학년 1학기 때 들어서였는지 참 재미있게 읽었다.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. 강의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고 미리 책을 읽어나갔다. 반지의 제왕이 내 눈을 즐겁게 해주기 훨씬 이전에 파리대왕이 내 기억의 한구석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.
1997년 가을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인 한국은행을 들어오기 위해 필기시험을 치고 합격한 후 나는 당시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와 면접시험을 쳤다. 이 총재의 질문 가운데 하나는 아주 평범했지만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던 것이었다.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무엇이었나? 내 대답은 파리대왕이었다. The Lord of Flies… 책 내용을 설명하면서, 내 감상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내가 영어영문과를 졸업하려는 학생임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.
학교를 졸업하고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선후배, 동기들이 마냥 그립기만 하다. 학교를 다닐 때는 그렇게 친하지도 못했고 불편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제는 모두 보고만 싶다. 그 많던 동기들은 다 무엇을 하고 있으며 선후배들은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? 간혹 멀리서 들리는 소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. 만나서 잘 못하는 술이나 한 잔 하고 싶은 걸 보면 나도 어느덧 늙었나 보다.
작년 초 90학번 동기들이 한 번 모인 적이 있다. 몇몇이서 동기들 연락처를 뒤지고 뒤져 연락을 하고 어렵사리 시간을 만들었는데 기대가 너무 커서였을까? 많은 동기들이 모임에 나오겠다고 약속했으나 실제로 얼굴을 볼 수 있었던 동기들은 불과 10명 남짓. 너무나 변해버린 모습을 옛날의 동기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나 보다. 아니 너무나 변해버린 동기들의 모습을 보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. 하지만 그날 본 동기들의 얼굴은 보기에 참 좋았다. 변해버린 그들의 모습은 내게 너무나도 익숙해 있었다. 아마도 그들의 모습에서 30대 중반의 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. 모두가 직장에서 시달리고 가정생활에 바쁘지만 하루 짬을 내서 맥주 한 잔 하던 그 순간이 내게는 시리게 달콤했다. 돌아서면서 또 보자고 던진 말들을 아직 실천에 옮기고 있지 못하지만 조만간 서로의 얼굴들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.
내가 일하는 직장에서 나는 특이한 존재이다. 직장 선후배 및 동료들은 내가 대학 시절 배웠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공부했던 사람들이다. 절반은 경제학을, 3분의 1은 경영학을 나머지는 법학이나 통계학을 공부한 사람들이다. 이들과 일하다 보면 난 때때로 내가 그들과 조금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. 소위 말하는 배경이 다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. 다만 그 다른 배경이 나쁘지만은 않은 듯하다. 귀동냥으로나마 들었던 문학작품들에 대한 기억이 내 삶 어디에선가 묻어나오고,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만을 위해 펼쳐보았던 영어학 관련 전공서적 내용들이 업무시간에 때때로 떠오른다.
정말로 웃긴 이야기 하나. 4학년 2학기 강의시간에 접했던 A University Grammar of English(Randolph Quirk & Sidney Greenbaum 공저)란 책이 나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미국 출신의 영문교열사 책상에 놓여 있다. 그 책을 사무실에서 처음 본 순간 난 정말 놀랐다. 내가 저 책을 본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어디서 봤었지? 그 미국인은 대학교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다. 그가 공부한 것을 나도 공부했으니 그럼 내 영어수준이 그 미국인의 수준과 같은 건가? 영문자료 교정을 위해 그에게 가면 그는 가끔 그 책을 펼쳐 든다. 자신도 헷갈리는 게 있으면 그 책을 참고한다고 하니 나도 사무실 책상 어딘가에 그 책을 갖다 놓아야만 할 것 같다. 그와 나는 같은 수준이니까…
사무실로 출근하면서 집으로 퇴근하면서 늘 연세대학교 앞을 지나다닌다. 너무도 익숙해져서인지 학교에 대한 감흥이 없어진 것만 같다. 그래도 인문관 주변을 가본 지는 꽤 된 것 같다. 주말에는 학교에 가봐야겠다. 아내와 딸의 손을 잡고 백양로를 걸어 올라가 인문관과 종합관의 정취를 느껴야겠다. 그 시절의 내 숨결과 발자국이 이곳저곳에서 나를 반기리라.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체취도 나를 기다릴 것만 같다. 영문도 모르고 영어영문과에 들어와 영문도 모르고 졸업을 한 나는 지금 이 순간 영문도 모르고 아련한 그 시절을 그리워만 한다.